2019 올해의 사진
필름에 담긴 노동

필름, 3롤, 노동. 지난여름 사진가들에게 ‘올해의 사진’ 기획을 제안했다. 예년과 달리 조건을 달았다. 필름 작업. 찍고 확인하고 바로 삭제하는 디지털 시대에 구닥다리 요청을 했다. 의외로 사진가들이 호응했다. 필름은 당장 어떤 장면을 포착했는지 알 수 없다. 현상을 거쳐야 한다. 필름 3롤. 장수도 제한했다. 한 장 한 장에 담긴 찰나는 사유의 시간이다. 사진가들의 사유까지 지면에 담으려 했다. 노동. 필름 3롤이라는 유한의 형식에 무한의 콘텐츠를 담았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노동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소설가와 시인, 작가들이 의미를 보탰다. 2019년 송년호는 표지부터 모두 필름카메라로 노동이라는 단일 주제를 담았다.

올 한 해도 많은 사건이 있었다. 우리가 매일 기록하는 동안 청소 노동자 서기화씨는 서울대병원으로 출근했다. 서규섭씨는 농토를 갈았다. 해고된 지 15년 만에 복직한 정용진씨는 일터에 해바라기씨를 뿌렸다. 서덕립씨는 콘크리트 외부 마감을, 채경표씨는 페인트칠을 했다. 또 누구는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가사노동을 했다. 다행히 이들은 매일 출근하고 매일 퇴근했다.

‘퇴근하지 못한’ 아들 용균씨를 둔 엄마 김미숙씨는 슬픔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 자신도 노동자인 그는 사회운동가가 되어 싸웠다. 엄마·노동자·사회운동가 김씨와 수많은 김용균들이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면적으로 바꿨다. 개정안이 새해 1월16일부터 시행된다. 김미숙씨와 김용균들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특성화고 학생의 산재를 다룬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쓴 은유 작가가 인터뷰어로 나섰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이 노동자다. 나 역시 노동자다. 아마 우리 자녀들도 노동자가 될 것이다. 새해에는 노동자가 존중 받는 사회가 되기를, 적어도 일터로 나간 노동자들이 모두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한다. 한 해 <시사IN>을 애독해준 독자 여러분의 평화를 빕니다.

<시사IN> 편집국장 고제규

© 윤무영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
© 이명익김미숙씨는 아들 용균을 보내고 삶이 “손바닥 뒤집듯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라고 말했다. 어느새 아들 없는 두 번째 겨울이다.
‘김용균들’을 위하여

사진 이명익·글 은유(작가)

<시사IN>은 올해의 인물로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를 선정했다. 김씨 덕분에 28년 동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그가 보낸 1년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목숨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지를 증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 이명익김미숙씨의 ‘동지’는 노동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다른 유가족들이다. 12월8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고 김용균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꿈을 꿨어요. 우리 아들이 나왔어. 애 아빠한테 우리 용균이 어딨어? 집에 없는 거야. 용균이 데리고 와! 울면서 떼를 썼거든요. 애 아빠가 다른 집에 있다면서 데리고 왔어요. 네 살짜리 아이만 한 용균이가 왔어요. 차에 태웠는데 뭐가 가려져서 잘 안 보이는 거예요. 그걸 치우니까 우리 아들이 웅크리고 있어요. 그래서 깼어요."

김미숙은 이틀 연속 꿈에서 아들을 보았다. 전날은 용균이 얼굴은 없이 목소리만 들렸다. 원래 꿈을 잘 꾸지 않는데 아들 기일이 다가와서 그런가 싶다. 어느새 아들 없는 두 번째 겨울이다.

김용균은 2018년 12월11일, 태안화력에서 일하다가 기계에 몸이 분리된 채 발견됐다. 한국 사회에 충격을 던져준 이 산재 사망 사건은 한편으론 이런 의미였다. 김미숙은 용균이를 만질 수 있는 용균이 엄마에서 용균이를 만질 수 없는 용균이 엄마가 됐다. 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는 “짐승처럼 악을 쓰면서” 울었다. 누가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한 청년의 생을 무자비하게 끊어내고, 한 엄마의 생을 뒤집어버린 이 참혹의 근간을 밝혀내기 위해 지난 1년 동안 김미숙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살던 집도, 하던 일도, 만나는 이도, 쓰던 말도, 그리고 세상에 대한 믿음도.

지난 6월 김미숙은 용균이를 낳고 길렀던 구미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특조위)’ 활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감시하기 위해서다. 용균이 방을 마련했다. 용균이가 쓰던 행거에 아이가 입던 교복, 양복, 즐겨 입던 후드티셔츠 같은 옷가지를 걸어놓았다.

© 이명익고 김용균씨가 작업지시 사항을 적어놓은 수첩은 석탄 때로 까맣게 얼룩져 있었다. 그의 메모 습관은 어머니 김미숙씨에게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유품 상자도 그대로 옮겼다. 물건 하나하나마다 사연이 많다. 폼클렌징과 수분크림은 용균이가 매일 쓰던 것이다. 아이는 얼굴에 여드름이 잘 나는 편이었다. 얼굴은 자기도 잘 안 만지고 엄마도 손을 못 대게 했다. “그래서 맨날 손등으로 만졌다.” 스킨도 한 가지 브랜드만 썼다. “집에 있을 땐 지 꺼 아깝다고 내 꺼 쓰는데, 같이 바르니까 좋았다.” 뭐든지 세트로 했다. 똑같은 우산을 세 개 사서 엄마·아빠·용균이, 셋이 나눠 들었다.

© 이명익고 김용균씨는 회사가 지급한 소형 랜턴이 고장 나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일했다.
© 이명익김미숙씨는 아들 용균이 작업 당시 착용했던 귀마개 역시 유품으로 보관해두었다.
© 이명익고 김용균씨의 개인 캐비닛에 보관되어 있던 간식과 컵라면, 수저와 칫솔.

샤워타월도 같은 제품을 두 개 사서 하나는 용균이에게 주었다. 원래는 흰색 바탕에 잔무늬 모양이었는데 유품으로 돌아온 그것은 거무스름했다. 아무리 빨아도 색이 빠지지 않았다. 일한 지 3개월 만에 샤워타월 색이 변할 정도로 탄가루 먼지가 심한 데서 아들이 일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져서 “둘이서 을매나 울었는지(용균이 아버지)” 모른다. 용균이가 일할 때 쓰던 수첩도 하얀 지면이 거무스름하다. 회사가 지급한 소형 렌턴은 금방 고장나버렸고, 그것을 대체하느라 조명으로 쓰던 스마트폰에도 석탄가루가 꽉 차 있었다. 이 검게 변색된 유품들은 아들을 삼켜버린 암흑과 야만의 노동 현실을 그대로 증거했다.

"용균이랑 영상통화를 많이 했어요. 주변이 완전 새까맣고 뭔가 반짝반짝 일어나는데 그게 탄가루인지 몰랐어요. 특조위에서 조사하러 갔을 때 공장을 가동한 상태에서 갔는데 이 사람들이 다칠까 봐 몸을 웅크리고 다녔대요. 위험한 게 말로라도 설명이 됐더라면…. 분진이 그렇게 날리는데, 위험한 것도 있지만 되게 더럽잖아요. 그런 곳에 자기 자식 집어넣을 사람이 어딨어요. 나도 하기 싫은 일을 어떻게 자식을 하게 만들어요. 내가 용균이 회사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그 속이 환경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더라면 발 빼게 하지 않았을까…."

취업 후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용균이는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집에 왔다. 그새 아들의 얼굴은 살이 쏙 빠져 있었다. 회사가 힘들지 않은지 물었더니 힘들다고 했다. 그럼 나오라고 했다. 아들은 “엄마, 조금 더 해볼게요”라고 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첫 회사니까 저도 더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알아주는 공기업인데 그 정도로 위험할 줄 몰랐으니까, 엄마는 좀 더 다녀봐도 된다고 생각했다.

"좀 안쓰럽긴 했죠. 근데 사실, 자식 사회생활 보내놓고 안 안쓰러운 사람이 어딨어요. 원래 일 배우는 건 어렵잖아요. 직장 생활이 얼마나 어려움이 있는지 저도 겪어봤으니까 잘 알잖아요."

'엄마'를 가장 닮고 싶어 했던 아들

김미숙은 충북 영동에서 육 남매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농사를 짓는 부모와 조부모까지 대식구가 살았다. 3대가 시골에서 산다는 게 녹록지 않았다. 돈 나올 구멍은 없고 빚이 늘어갔다. 바로 위에 언니가 5학년 때 부산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서 살게 됐다. 자연스럽게 미숙이 집안의 맏이 역할을 했다. "책임감도 느껴지고 아버지 어머니한테 잘해드리고 싶고 속을 안 썩여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쌓였다."

언니가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극구 말리는 상황을 본 미숙은 아예 대학이란 말도 꺼내지 않았다.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시골 삶이라는 게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이었다. 고달픔이 다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원망이 들겠는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미에 있는 섬유회사에 바로 취직했다.

그땐 비정규직이 없었다. 잔업수당 계산이 틀린 걸 얘기하면 정확히 챙겨주는 나름 괜찮은 사장 밑에서 10년을 일했다. 섬유업종의 특성상 일하다가 죽는 사람도 못 봤다. 일한 만큼 벌었고, 그 돈을 착실히 모았다. 기숙사에서 쓸 비누나 샴푸를 제일 싼 것으로 사두고 용돈은 한 달에 5000원, 두 번 외출하는데 한 번에 2500원이면 족했다. 여름엔 친구들이 매점에서 하드를 사먹는데 그조차 참았다. 최소한의 생활비만 제하고 남은 돈은 몽땅 집에 보냈다. 보너스는 열어보지도 않고 다 드렸다. 그렇게 3년간 집안의 빚을 갚아드렸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집에 갔어요. 그날 무지개가 떠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곁에 계셔가지고, 아버지 저기 봐봐 무지개 정말 예쁘다. 보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이리 와봐, 하면서 손 내밀어보래요. 손 내밀었더니 갑자기 제 손에 뽀뽀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저 무지개 되게 예쁘지?' '네' 이랬더니 '저 무지개보다 더 예쁜 게 있어.' '뭔데?’ 그랬더니 '우리 미숙이 속마음' 이러셨지요."

남편과는 사내 커플이다. 동료로 일하면서 티격태격 소소한 신경전을 벌이다가 정이 들었다. 저 사람이랑 살면 괜찮겠다 싶은 마음이 서로 있었지만 말은 안 하는 상태에서 그녀가 다른 회사로 가게 됐을 때 그가 고백했다. 1994년 12월6일 용균이가 태어났다. 스물여섯 김미숙은 엄마가 되었다. 출산 후 집에 있으니까 우울증이 올 것 같았는데 다시 “나가서 일하니까 살 것 같았다”. 용균이 초등학교 때 시댁 쪽에서 농사를 지었던 시기를 제외하면 김미숙은 출퇴근을 쉬어본 적이 없다. 이왕이면 수당이 높은 주야 근무로 했다.

8년 전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는 생계를 전담했다. “남자만 가장 역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남자가 아프면 여자도 가장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는 전자부품 검사하는 일을 했다.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만 반복하지 않고 항상 전체 업무 흐름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대충 넘기지 않는 꼼꼼함으로 다른 파트의 전산 오류를 잡아내기도 했고, 새로운 업무에 처음 투입됐을 때도 집중력을 발휘해 불량률을 현저히 낮췄다. 매년 우수 직원을 뽑을 때 상사들이 김미숙을 꼽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가정을 지키려고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가정도 못 지키고…. (한숨) 애도 철이 일찍 들었죠. 엄마 아빠 고생하는 걸 어려서부터 봤잖아요. 저하고 약간 심성이 비슷해요. 저는 애한테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다 얘기해줬어요. 회사에 가서 일을 배우는데 잘 못 알아들으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기도 힘들잖아요. 제가 정말 눈썰미가 없거든요. 업무를 익히기가 어려워서 꼭 메모를 했어요. 용균이도 저 닮았어요. 그래서 애한테도 새로 배울 땐 무조건 쓰라고 했죠. 군대 가면서부터 메모를 했고, 사회생활 시작하면서도 메모 습관을 길들이게 했어요. 저는 메모가 참 좋다고 생각해요.”

유품이 된 용균이의 때 묻은 수첩은 엄마가 물려준 유산이었다. 요령 부리는 법 없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것으로 삶에 헌신한 김미숙이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귀한 것이자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엄마를 용균이는 자랑스러워했다. 한번은 명절에 고모가 용균이에게 넌 닮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엄마!”라고 대답했다. “울 엄마는 일도 너무 잘하고 자식한테도 끔찍하게 잘해주니까 저절로 그렇게 생각이 된다”라고 한 것이다. 용균이 고등학생 때 일이다.

“모든 생활의 중심이 용균이였어요. 초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제가 데리고 받아쓰기부터 가르쳤어요. 알림장 보고 예습을 시켜서 보냈어요. 학원 다니면서 선행학습 한 애들이랑 다르다고 담임선생님도 칭찬하셨죠. 애 아빠랑 저랑 티브이를 보고 있으면 용균이가 중간에 끼어들어요. 그럼 뽀뽀를 하는 게 우리는 일상이에요. 어릴 때부터 커서까지 쭉 그랬어요. 애가 잔병치레도 많았는데 자라면서 괜찮아졌거든요. 용균이한테 그랬죠. 공부 열심히 안 해도 돼, 어렸을 때처럼 아프지만 않고 우리 곁에 오래 있으면 우리는 그걸로 만족해.”

김미숙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반짝인다. “아들 얘기 하니까 기분이 좋아서”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간다. 아들을 손으로 만질 순 없지만 말로는 어루만질 수 있다. 아들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아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엔 행복한 용균이 엄마로 돌아간다. “가슴에 식지 않는 불덩이”를 잠시라도 식힐 수 있다.

© 이명익아들 이야기를 할 때면 김미숙씨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김미숙씨가 아들 용균이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당시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쓴 글들

‘저는 신에게 빌고 싶습니다. 우리 아들과 같이 올바르게 성장한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 이윤 앞에 목숨이 하찮게 버려짐을 안타까워하며, 그렇게 구조를 만든 인간 같지 않은 사람들이 강한 천벌을 받게 해달라고 빌고 싶습니다. 저를 지켜주는 신이 있다면 나라에 의해 처참하게 자식을 잃어 힘든 세상을 사는 어미의 심정을 헤아려, 약육강식을 만들어놓은 사업주와 정부를 강한 처벌로 혼내주었으면 합니다(12월2일 김미숙이 쓴 글).’

김미숙은 아들을 보내고 삶이 “손바닥 뒤집듯이 완전 바뀌어버렸다”. 언론사 카메라 앞에도, 광장에도 섰다. 수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대통령을 만났다. 토론회에서, 추모제에서, 문화제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발언을 하고 글을 썼다. 이처럼 맹렬한 활동의 계기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김미숙은 답했다. “집에 있으면 아들 생각이 나서 미칠 것 같으니까 사회운동을 하러 나간다”라고.

“전에는 접해보지도 않았고 상상도 안 해봤던 일들이에요.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정신없이 했던 일이고 지금은 업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도 이런 활동들이 쉽지는 않아요. 제가 충청도에서 살다가 구미로 갔잖아요. 처음에는 사람들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사투리가 심해서요. 꼭 그런 기분이었어요. 애 사고가 나고 대책위가 꾸려져서 회의를 하는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어요. 한 열흘쯤 지나니까 귀에 들어와요. 이젠 동지라는 말이 참 좋아요. 뜻을 같이한다는 거잖아요.”

김미숙의 동지는 노동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다른 유가족들이다. 처음엔 저 사람들이 왜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가 미심쩍기도 했다. 그런데 같이 어울릴수록, 알아갈수록 진국이었다.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잘못된 것을 바꾸기 위해 오래전부터 꾸준히 일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그는 크게 놀라고 감동했다. 지금은 존경하고 의지한다. 유가족에겐 어디서도 얻기 어려운 위로를 받는다.

“가족들은 혈연관계라서 당연히 의지가 되는데 자식 잃은 깊은 힘든 심정은 잘 몰라요. 근데 유가족들은 알잖아요. 이런 사고 안 겪은 가족들은 맨날 좋은 거 얘기하고 자기들 삶 얘기하지만 우리는 좀 동떨어져 있죠. 말하고 싶은 게 달라요. 그러니까 말도 좀 덜하게 되고 내가 말하면 좀 어두워지고 그러니까 꺼려지고. 유가족들 만나면 같은 상황이니까 눈치 안 보고 얘기해요.”

김미숙은 늘 그랬다. “배울 때는 정말 어렵게 배우는데 한번 배웠다 하면 끈기 있게 한다.” 요즘 그의 중요한 하루 일과가 되어버린 글쓰기도 그렇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낭독하는 모든 글은 김미숙이 직접 쓴다. 아들을 보내고 아픔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때, 하루에 두세 시간 눈 붙이고 나면 밤이 무척 길었다. 울다가 끙끙대다가 고통을 잊고자 조금씩 쓰기 시작한 글들을 광화문에서 읽었다. 정부, 여당, 유가족, 합의 이행, 권고안, 고용불안, 비정규직, 원하청 등등 용균이랑 살 때는 입에 올릴 일이 거의 없던 낯선 말들도 쓴다. 뉴스에서나 보던 저 단어들만이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설명해주기에 자꾸 사용하다 보니 일상어가 되었다. 정치가 김미숙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저도 가장으로서 내 할 일은, 열심히 돈 벌어서 우리 가족 잘 보살피고 앞길 잘 닦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그때는 그게 너무 당연했죠. 내가 정치를 외면했고 사람들이 이렇게 죽고 있다는 걸 모르고 살 수밖에 없었어요. 만약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뭔가를 하지 않았을까요. 대부분 사람들도 자기는 그런 일이 안 닥칠 거라고 생각하니까 외면하겠죠. 수명도 길어졌잖아요. 정규직으로 일하다가 비정규직이 되는 경우도 있고요. 우리 사회에서는 일하다가 죽는 사람이 정말 많고 그게 언젠가는 내가 될 수도 있어요.”

‘소 잃어본 사람이 외양간 고치지 소가 멀쩡히 있는 사람은 모르더라’는 세월호 유가족의 말대로, 잘 몰랐다가 잘 알게 된 김미숙은 연장을 들었다. 지난 10월 김용균 재단을 세웠다. 작은 아이 하나를 기리기 위한 단체가 아니라 일하다가 죽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연대 조직을 꾸리려는 큰 그림을 그렸다.

“특조위 권고안이 22개가 나왔는데 하나도 이행되지 않고 있어요. 이행되려면 기업인이나 정치인이 반대를 정말 심하게 할 거고 그러면 뭉칠 수 있는 게 국민밖에 없어요. 국민을 엮으려면 큰 조직이 있어야 되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제 주변에 많은 단체, 유가족들, 불의를 막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 같이 뭉쳐 조직을 만들어서 악법 만드는 것도 반대하고, 또 이렇게 뭉치는 것만 해도 저들에게 큰 위협이 되잖아요. 촛불 때처럼 모여야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미숙은 김용균 1주기 추모행사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너를 비록 살릴 순 없지만, 다른 사람이 우리처럼 삶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 싶다”고, 그래서 “엄마는 이제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길을 위해 걸어갈 것”임을 다짐했다. 이는 “저는 제 삶을 허투루 산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한 사람의 선언이다. 아버지를 감화시켰고 아들이 자랑스러워하던 “무지개보다 더 예쁜 미숙이 속마음”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김용균들’을 구하는 세상의 빛이 되고 있다.

© 이명익12월10일 충남 태안군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열린 고 김용균 1주기 추모식에서 동료들이 고인의 책상에 헌화하기 위해 국화를 들고 대기하고 있다.
© 이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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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오겠습니다

사진 이갑철·글 박서련(소설가)

2호선으로 출퇴근하던 시절에는 지하철이 제때 오지 않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늦어지는 만큼 더 많은 사람이 탈 테고, 문 여닫는 시간이 점점 지연될 거고, 미어터지는 지하철 안에 내가 체류하는 시간 또한 길어질 테니까. 그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것은 오로지, 이 일을 견디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뿐이었다. 이 시공( 時空 )이 내게만 숨막히는 게 아니니까 나도 버텨야 한다는, 남들 다 하는 일이니 나도 그럴 수 있다는 믿음.
하지만 이따금 궁금하다. 그때 나와 어깨를, 때로 거의 온몸을 스친 어떤 사람에게는, 나야말로 무표정하게 일상을 견디는 남처럼 보였을까. 내가 유난이었을까. 죽지 않으려고, 그러나 죽을 것 같은 느낌으로 일터를 오가는 사람은, 과연 나뿐이었을까.

©이갑철
©이갑철
©이갑철
© 최형락
© 최형락
© 최형락
저기 어둠 속에 분명 누가 있다

사진 최형락·글 김민섭(사회문화 평론가)

일하는 나의 몸은 차의 룸미러라든가 거리의 쇼윈도라든가 하는 거울을 통해서만 주로 보인다. 나의 얼굴이나 옷차림을 보는 일은 낯설고 민망하다. 익숙한 것은 눈과 손가락이다. 보고 누르는 것이 결국 이 일의 전부다. 콜이 올 때 주변의 기사들보다 조금 더 빨리 반응 해야 한다. 누군가는 튼튼한 다리가 더 중요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거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몇몇 신체기관을 제외하고는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다. 코와 입이 모두 달려 있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나의 몸은 이전보다 덜 안전하고 덜 보장받는다. 그러나 간편함이라는 말에 계속 투명해지고 만다. 노동하는 모두의 몸이 그렇겠지만, 우리는 어쩌면 거대한 플랫폼에서 살아가며 스스로의 몸을 지워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김형진씨는 우버·타다·배민·요기요 등 주로 플랫폼에서 일을 찾는다. ©최형락
일산 라페스타 부근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빈 택시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너는 대리운전 기사들. ©최형락
새벽 2시, 대리운전 기사 이창배씨가 콜을 기다리고 있다. ©최형락
© 주용성
깜빡깜빡, 도시의 등대

사진 주용성·글 이동은(영화감독)

밤이 깊어갈수록 어둠이 짙어갈수록 이곳은 섬이 되어가요. 형광등 불빛이 등대처럼 보인다면 당신은 길 잃은 배의 선장일 테지요. 무인도는 아니에요. 여기에도 사람이 있답니다. 형광등 하나가 불안처럼 깜빡입니다. 처음 스위치를 켠 후 단 한 번도 밤낮 꺼지지 않은 불빛이에요. 시작은 동시에 다 함께였는데 한 등만 먼저 모스부호 같은 작별 인사를 건넵니다. 남은 형광등은 서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지속해서 빛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버티다 소진되어가는 걸까. 그 물음에 저는 답하지 못하고 잠시 이 섬에 제 허기를 덜고 어둠 속으로 또 나아갑니다.

© 강영호
© 강영호
© 강영호
© 강영호
당신은 이 안에 있어요

사진 강영호·글 김세희(소설가)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운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한없이 구체적인 행위 속에서 점점 나는 나를 익명으로 느낀다. 내가 누구인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나는 통로이고 전달자이고, 이 거대한 세상에서 작은, 결코 보이지 않는 톱니바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나는 많은 여자들 중 하나로서 나를 느낀다. 참 이상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는 매 순간 나를 발견한다. 내 안의 여우, 토끼, 말, 뱀과 만난다. 아니, 너 거기 있었구나. 맞아, 그렇지. 나는 말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어. 놀랍고, 반갑고, 때로 되살아난 고통 때문에 좌절한다.

©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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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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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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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노동’이 왜 싸구려인가

사진 변백선·글 최현숙(<작별 일기> 저자)

대부분의 임금노동은 자본과 신자유주의를 강화한다는 면에서 ‘노예노동’의 측면이 크다. 게다가 대공장 중심의 남성 노동들은 대부분 생태를 파괴하는 ‘나쁜 노동’이다. ‘돌봄 노동의 사회화’라는 명분으로 2008년부터 우리 사회에 확산되어 중하위 계층 여성들이 맡고 있는 돌봄노동은,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상품이 아닌 관계와 성찰을 확장한다는 면에서 ‘좋은 노동’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이 노동과 노동자를 가장 싸구려로 취급하고 있다.

©변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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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한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가 노인들의 활동을 돕고 있다. ©변백선
© 신선영
© 신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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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노동의 가벼움

사진 신선영·글 김은화 (<나는 엄마가 먹여살렸는데> 저자)

비품들은 당당하다. 휴지도, 박스도, 밀대도 창고에서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한다. 그것들에 기대어 한숨 돌리는 손은, 몸은 조심스럽다. 엉거주춤하게 앉아 발 한번 마음 편히 뻗지를 못한다. 혹여 냄새라도 날세라, 끼니에 온기 하나 없다. 내가 이것들보다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무어냐. 부지런히 일해서 나를, 내 식구를 먹여살리는데 어째서 비품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하느냐. 여자라고 밥숟갈의 무게가 다르지 않을진대, 어째서 노동에 대한 예우는 이다지도 가벼우냐…. 청소노동자로 직접 고용되기까지 10년, 앞으로 쉴 권리를 인정받기까지는 얼마나 또 긴 시간이 필요할까. 지하 3층 비품들이 지상의 젠체하는 인간들의 품위를 비웃는다.

서울대병원 청소노동자 서기화씨(63)가 지하 3층 창고에서 쉬고 있다. 간단한 아침 식사도 이곳에서 해결한다. ©신선영
©신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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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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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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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이웃

사진 김옥선·글 윤고은(소설가)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구름은 일정한 속도로, 무빙워크를 타고 이동하듯 흘러간다. 그는 시야에서 구름이 사라질 때까지 그곳을 바라보고 서 있다. 단지 시선을 옮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는 구름의 이동을 돕는 기분이 된다. 구름이 그에게 어떤 요청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유유하게 흘러가는 것들을 본다. 구름 하나가 무사히 지나간다. 어쩌면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이 순간 그의 모든 것을 얹어놓은 구름이.

아랍인 부모를 둔 리사는 미국인이다.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김옥선
셰린은 바다를 좋아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인이다. 한국에서 항해사로 일했다. ©김옥선
보디는 방글라데시 소수민족인 줌머족이다. 한국에서 공장을 다녔다. ©김옥선
크리스찬은 카메룬인이다. 정치적 문제로 한국에 망명했다. 수도권에서 일했다. ©김옥선
© 신희수
© 신희수
© 신희수
© 신희수
124년 전 영화처럼

사진 신희수·글 조기현(<아빠의 아빠가 됐다> 저자)

1895년 프랑스, 공장에서 바삐 퇴근하던 노동자들이 한 카메라에 찍힌다. 뤼미에르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영화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이자 노동자들을 찍은 첫 번째 영화가 되었다.

2019년 한국, 산업 현장에서 죽음으로 퇴근 하지 못한 노동자가 매일 3명이나 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는 묻는다. 우리는 124년 전 영화처럼 하루만치 노동을 해내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찍을 수 있을까? 카메라가 노동자들의 경쾌한 발걸음을 따라가면 꿈과 안정을 목격할 수 있을까? 땀 흘린 만큼 꿈꾸고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세상의 ‘찍히는 노동자들’을 상상해본다. 그 세상에서 노동자의 이미지는 위험과 죽음만을 압도적으로 증언하지 않을 터이다.

이정근씨(47)는 배관 용접 전문으로 20년 경력자다. ©신희수
김영대씨(27)는 3년째 실리콘 코킹 일을 하고 있다. ©신희수
서덕립씨(59)는 20년 넘게 노출 콘크리트 외부 마감을 해왔다. ©신희수
채경표씨(60)는 페인트칠 경력만 35년 이상이다. ©신희수
© 신웅재
© 신웅재
인생의 단맛

사진 신웅재·글 이상원 기자

생애 처음 마셔본 칵테일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맛은 생생하다. 그것은 대학생의 맛이었다. 노안인 친구가 편의점을 ‘뚫어’ 얻은 비릿한 맥주와는 달랐다.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따라주는 그 정당하고 싱싱한 액체에 모두가 홀렸다. 매번 무언가를 축하하고 즐겼다.

근처에서 자취를 하던 나는 어느 날 새벽, 셔터를 내리던 칵테일 바 직원의 수심 가득한 얼굴에 놀란 적이 있다. 짓궂은 주정을 부리는 친구들에게도 웃는 낯으로 대하던 이였다. 지난밤도, 밝아올 낮도 그에게는 축제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몇 번 더 비슷한 광경을 보았다. 나보다 불과 서너 살 많아 보였던 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때는 별로 궁금하게 여기지 않았다.

바 ‘리퀴드 소울’의 김설희 매니저 겸 바텐더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바텐더들은 정해진 휴식 시간이 없다. ©신웅재
©신웅재
© 김문호
© 김문호
© 김문호
빼앗긴 신성

사진 김문호·글 이문재(시인)

아닙니다. 노동은 신성하지 않습니다. 노동이 신성하다면 노동자가 이토록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가 신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삼스러운 말씀이지만 우리는 기계가 아닙니다. 기술도 아닙니다. 직업이나 연봉 또한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사람 그 자체로 신성한 사람. 그런데 그 신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빼앗겼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 안의 신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우리가 신성해진다면 우리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도 신성이 녹아들 것이고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 다른 생명과 만날 것입니다. 부디 우리의 신성이 다른 많은 신성과 만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이 세상이 신성한 미래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일깨워주십시오.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경기도의 한 농촌 지역. 공업 오염물질과 건축폐기물들이 농지 바로 옆에 쌓여 있다. ©김문호
배출되는 공장 바로 옆에서 농사가 이뤄진다. ©김문호
공업용수로 인해 썩은 개천 너머 해가 저문다. ©김문호
© 윤성희
© 윤성희
© 윤성희
해바라기 꽃 필 무렵

사진 윤성희·글 김현(시인)

켄 로치 감독의 신작 영화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는 일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일할 수밖에 없어서 비극에 처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을 다룬다. 한 사람을 가장 안전하게 하는 ‘노동의 자유’가 자본에 의해 규격화 되는 순간, 한 사람을 가장 안전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는 뼈아픈 사실은 다시 한번 묻게 한다. 쉴 수 있는 노동자를 ‘리스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안전을 방패가 아니라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누구인가. 확인하게 한다. 자본은 안전한가. 이제 우리의 자본주의는 더 극악하게 죽도록 노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는다는 거짓을 사실로 전파하는 중이다. 과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철도공사 수색차량사업소에서 철도검수원으로 일하는 정용진씨가 디젤전기기관차 운전실 전면 유리창을 보수하고 있다. ©윤성희
정용진씨가 디젤전기기관차 뒷부분과 제동관 호스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윤성희
파업으로 해고된 지 15년 만인 2018년 5월 복직한 정용진씨는 철길에 해바라기씨를 뿌려두었다. ©윤성희
© 이한구
© 이한구
© 이한구
© 이한구
© 이한구
© 이한구
노동은 일단 비싸야 한다

사진 이한구·글 황정은(소설가)

내 동거인은 일주일에 엿새를 청계천으로 출근한다. 간단한 음향기기를 수리하면서 세운상가 일대의 사물 흐름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대체로 온화한 사람이었으나 청계천으로 물건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세상 아깝고 분한 것이 인건비 지출이라는 것을 다양한 상황으로 겪고 분노가 많아졌다. 사람값을 너무 싸게 여기는 사고가 만사의 원흉이다, 동거인과 나는 그런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곤 한다. 내 동거인은 노동이 신성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의심하고 본다. 노동이 신성한가. 노동은 일단 비싸야 한다….

동거인의 경력은 15년이다. 사물들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이려니 자주 어딘가를 다친 채 귀가한다. 여기서 지금 내 노동이 신성해지는 순간은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무사히 미래가 될 수 있을 때뿐인 것 같다고 동거인은 말한다.

삼일고가도로가 있던 1988년 청계천 풍경. ©이한구
1993년 당시 청계천에 밀집해 있던 공업사와 공구상에서 일하던 청년 노동자들. ©이한구
한때 청년 노동자였던 이들은 숙련된 장인이 되어 청계천 풍경과 역사를 이어왔다. 태광정밀 조무호씨(59)는 밀링, 선반 업무만 37년간 해왔다. ©이한구
황동금속 김희명씨(60)는 금속 아르곤용접을 38년째 하고 있다. ©이한구
대성프레스 박영근씨(63)는 프레스, 선반, 밀링으로 40년 세월을 보냈다. ©이한구
36년간 과학 교재 및 기자재를 만들어온 태창금속 고선기씨(58). 이들의 삶과 기술은 재개발에 밀려날 위기다. ©이한구
© 정택용
© 정택용
© 정택용
땀으로 빚은 불꽃

사진 정택용·글 전혜원 기자

기계가 없앨 일자리를 그토록 걱정하면서도 우리는 남의 노동에 냉소한다. 해고된 톨게이트 요금수납원에게 하이패스의 편리함을 설교하듯이. 자동차 내연기관 부품인 실린더라이너를 만드는 이들도 엔진이 필요 없는 ‘전기차 시대’가 오면 사라질지 모른다. 그게 언제든, 여전히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은 1500℃ 가까운 열기 속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만드는 불꽃이다.

공장자동화도 노동자 없이는 완전할 수 없다. 자동차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엔진의 주요 부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손을 모두 거쳐야 한다. ©정택용
공장자동화도 노동자 없이는 완전할 수 없다. 자동차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엔진의 주요 부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손을 모두 거쳐야 한다. ©정택용
공장자동화도 노동자 없이는 완전할 수 없다. 자동차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엔진의 주요 부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손을 모두 거쳐야 한다. ©정택용
© 이상엽
© 이상엽
© 이상엽
종이는 삶처럼 무겁다

사진 이상엽·글 유희경(시인)

윤전기가 멈추는 날이 있어서는 안 된다. 기계 값 수억원을 갚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쇄 노동자들은 귀마개를 착용하고 일한다. 종일 들리는 굉음을 견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잘 들리지 않으므로 그들은 말이 없다. 묵묵히 손발을 맞춰가며 종이를 넣고 색과 열을 맞춘다. 이따금 인쇄소에 갈 때면, 그들의 보람을 생각하게 된다. 인쇄물의 무용함을 주장하는 시대에 에어컨을 틀어놓아도 소용없는 열기 속에서 마스크를 착용해도 걸러지지 않는 종이 먼지를 마시며 그들은 이 과정의 어디로부터 즐거움과 기쁨을 얻는 것일까. 밤이 깊어 교대할 때, 그리하여 귀마개를 빼낼 때 그들이 듣게 될 소리가 온건해 웃음이 났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아니, 응당 그래야 할 것이다.

인쇄소에 쌓인 종이들. ©이상엽
야근하는 인쇄소 기장의 모습. ©이상엽
서울 충무로 인쇄 골목의 밤. ©이상엽
© 임종진
© 임종진
© 임종진
© 임종진
사람의 속을 채워주는 손

사진 임종진·글 최은영(소설가)

다섯 평짜리 초밥 식당 ‘혼맛스시’의 사장님들은 삼십 대 중반의 청년들이다. 매주 네 번, 새벽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신선한 횟감으로 음식을 만든다. 그들의 분주한 두 손에서 만들어지는 작은 세상이 허기진 사람들의 배와 마음을 채운다. 이 세상에 사람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얼마나 더 있을까. 일확천금이며 불로소득을 선망하는 사회에서 귀한 일로 사람의 속을 채우는 사장님들의 모습은 그래서인지 더욱더 눈부시다. 오늘도, 내일도 일한 만큼의 정당한 보람이 그들에게 갈 수 있기를, 번창하시기를 바라본다.

©임종진
©임종진
©임종진
©임종진
© 조남진
© 조남진
신발이 닳도록, 마음이 닿도록

사진 조남진·글 천주희(<회사가 괜찮으면 누가 퇴사해> 저자)

오늘도 닦는다. 바닥도 거울도, 내 땀도 얼굴도. 손님이 남긴 검은 때도 흔적 없이 닦는다.
오늘도 웃는다. 신발 열 켤레를 갈아 신어도, 툴툴거리며 나가도 짜증 없이 웃는다.
오늘도 오른다. 쪼개진 의자에 켜켜이 덧붙인 녹색 테이프가 닳도록, 까치발에 기대어 오른다.
오늘도 달리고, 오늘도 껴입고, 오늘도 미끄러지고, 오늘도 굽고, 오늘도 옮기고, 오늘도 쓸고,
오늘도 진열하고, 오늘도 포장하고, 오늘도 인사하고, 오늘도 죽는다.
오늘도 당신은 안녕하신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다음 겨울에도 당신이 일터에서 평안하기를,
나의 오늘이 당신의 오늘을 위해 기도한다.

경기도 성남의 한 스포츠 브랜드 매장. 수많은 박스 사이에서 고객이 원하는 디자인과 사이즈를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한다. ©조남진
경기도 성남의 한 스포츠 브랜드 매장. 수많은 박스 사이에서 고객이 원하는 디자인과 사이즈를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한다. ©조남진
© 김흥구
© 김흥구
© 김흥구
© 김흥구
전기공 시인

사진 김흥구·글 임지영 기자

시상( 詩想 )은 어디에 있을까. 시인 임재정은 전기공이다. 돌돌 만 전기선을 한쪽 어깨에 메고 나머지 한 손에 작업 도구를 든 채 빛 없는 건물을 향한다. 그가 다녀간 장소마다 불이 켜진다. 세 자녀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등단한 지 9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 스패너, 전기포트, 드라이버. 사용한 시어들이다. 시상은 어디에나 있다. 천장의 배선을 살피다가, 운전을 하다가, 밥을 먹다가 불쑥 만났다. 일과가 끝난 뒤 책상에 앉아 단어를 고르고 가다듬는다. 그의 하루를 좇은 사진가는 ‘작업장의 소음이 운율이 된다’라고 기록했다. 시인은 하나의 정체성이다.

임재정 시인이 전기 배선공사에 필요한 작업 도구와 재료를 운반하고 있다. ©김흥구
일을 마친 임재정 시인이 귀가하고 있다. ©김흥구
임재정 시인이 아들과 함께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김흥구
집으로 돌아온 임재정 시인이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전기공사 일을 하며 쉰이 넘어 첫 시집을 냈다. ©김흥구
© 홍진훤
© 홍진훤
예술의 공간 밥벌이의 공간

사진 홍진훤·글 장일호 기자

이제는 등단 대신 생계를 선택한 내 친구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로또 1등과 당신 중에 선택하라면 당신을 선택할 거고, 문학과 당신 중에 선택하라면 문학을 선택할 거야.” 나는 가능하다면 그 친구가 등단할 때까지 ‘밥’이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긍은 스스로 밥을 벌어먹는 일 에서 나오는 것. 예술가에게는 그마저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하루 전시 대가로 250원을 책정했다. 좁디좁은 방 안에서 세상과 세계를 보는 그들의 노동은 쉽게 공공재 취급을 받았다. 그렇게 창작 노동이 모욕당했다.

사진가 K의 책상. ©홍진훤
사진가 P의 책상. ©홍진훤
© 주용성
© 주용성
‘새벽 배송’은 모르는 농촌의 속도

사진 주용성·글 한승태(<고기로 태어나서> 저자)

‘새벽 배송’이 인기다. 똑딱하는 사이 문 앞에 도착한다고.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속도의 환영( 幻影 ) 속에 살고 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고 믿게 만드는 환영 속에. 그러나 지게에 짐을 실어 인간이 짊어지고 옮겨야 하는 곳에선 있는 그대로의 속도만이 존재한다. 한 걸음을 내디디면 한 걸음만큼 가까워진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나무가 가지를 뻗는 속도가 그렇듯이. 그런데도 하루를 마무리할 때 쯤 많은 일을 해냈다며 뿌듯해하는 쪽은 언제나 그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어째서일까?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에 있는 서규섭씨의 유기농장. 겨우내 경작 규모를 줄이기 때문에 수입은 크게 줄지만 땅을 쉬게 해 건강한 먹거리를 재배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주용성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에 있는 서규섭씨의 유기농장. 겨우내 경작 규모를 줄이기 때문에 수입은 크게 줄지만 땅을 쉬게 해 건강한 먹거리를 재배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주용성

'2019 올해의 사진'에 참여한 사진가

강영호

상업 사진가로 시작해 순수 사진가로 영역을 확장해 20년간 활동했다.

카메라 : LOMO LC-A+

필름 : Lomography color negative 35㎜ 800

김문호

다큐멘터리 사진가. 인간과 도시와 문명을 화두로 40여 년간 작업해오고 있다.

카메라 : Leica M6

필름 : Kodak Tri-x

김옥선

주변적 감각과 혼성적 일상을 주제로 작업하는 사진가.

카메라 : Linhof Technika 4X5

필름 : Fuji 160NC

김흥구

끊임없이 사건이 재생산되는 그곳에서 사건과는 무관할 수도 있는 시간들을 주워 담는다.

카메라 : Canon Eos 1N

필름 : Kodak Tri-x

변백선

<노동과 세계> 사진기자. 노동과 인권 등 당대 사회 현안 속의 사람과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카메라 : Nikon F3

필름 : Fuji X-tra 400

신선영

<시사IN> 기자. 사진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 지금·이곳에 궁금한 게 많다.

카메라 : Canon Eos 5

필름 : Kodak Tri-x

신웅재

사진이 인간의 사유와 행동의 시작점 혹은 변화의 촉매제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카메라 : Leica M6

필름 : Kodak portra 800(3200 push)

신희수

다큐멘터리 사진가. ‘노가다’를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

카메라 : Hasselblad 503cxi

필름 : Kodak 160

윤무영

<시사IN> 기자.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 사진을 시작해서 필름이 귀한 지금까지 사진으로 밥벌이를 한다.

카메라 : Canon Eos 5

필름 : Kodak Tri-x

윤성희

기사를 쓰다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을 찍으며 글을 쓴다.

카메라 : Canon Eos 1n

필름 : Kodak potra 400

이갑철

‘타인의 땅’에서 충돌과 반동을 느끼고, ‘적막강산’에서 에너지를 느낀다.

카메라 : Canon Eos 1n

필름 : Kodak Tri-x

이명익

<시사IN> 기자. 사진가와 사진기자의 경계 어딘가에 그가 있다.

카메라 : Canon Eos 5

필름 : Kodak Tri-x

이상엽

‘2019 올해의 사진’에 참여한 사진가들을 조직하고 사진을 큐레이팅했다.

카메라 : Minolta a9

필름 : Kodak portra 400

이한구

생의 전부든 한때든, 몸으로 밀고 나아가는 삶의 모습을 주목하는 사진가이다.

카메라 : Pentax 645

필름 : Kodak Tri-x

임종진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는 이룬 것이 별로 없고, 심리 상담을 전공한 사진 치유가로서는 이룰 일이 많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카메라 : Leica R4

필름 : Kodak Tri-x

정택용

일하는 사람들의 땀과 생태를 위협하는 인간의 탐욕에 관심이 많은 사진가이다.

카메라 : Canon Eos 3

필름 : Kodak Tmax 400

조남진

<시사IN> 기자. 개성공단에서 ‘풀취재’한 탓에 미국 출장길이 막혔다. 박근혜 게이트 당시 ‘최순실 용안’을 사진 특종했다.

카메라 : Canon Eos 1n

필름 : E100

주용성

지나버린 것이 남긴 풍경과 사회적인 문제, 특히 정치적이고도 사회적인 죽음에 관심을 두고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 : Leica M6

필름 : Kodak portra 400

최형락

인간의 속성에 관심이 많다. 만나는 사건과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찾으려 애쓰는 편이다.

카메라 : Canon New F-1, Canon Eos 1v

필름 : Fuji Provia 100F

홍진훤

인간이 의도치 않게 만들어버린 빗나간 풍경을 응시하고 카메라로 수집하는 일을 주로 한다.

카메라 : Linhof Technika 4X5

필름 : Kodak portra 160